중앙회장 칼럼

.
기후위기에 두려움을 가져야
작성일
2021-05-24

요즘 기후위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두려움을 생각해봅니다. ‘두려움을 떠올리면 문학의 금자탑을 쌓은 작품 가운데 하나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납니다. 이 소설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찬사도 많이 받았지요.

크레타섬에 있는 카잔차키스의 그 유명한 묘비명에 두려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글입니다. 욕망을 거세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두려움이 없어져야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묘비명을 인용하기 때문에 자유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대한 반대의 언급도 있습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느껴야 된다는 것이지요. 두려움이 있어야 간절함이 나온다는 점에서 마음에 와 닿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오른 카잔차키스보다는 무명에 가까운 작가의 두려움에 대한 성찰에 더 깊이 공감이 됩니다. 두려움은 나약함이나 비겁함이 아닙니다. 마주한 대상이나 현실에 대한 배려입니다. 사랑이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업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구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랑을 더 안전하게 이끌고, 사업의 취약점을 보완하며, 인류가 처한 재앙에 준비할 수 있게 합니다.

“100살까지 살고 싶어요라고 절규하는 어느 10대 소녀의 외침은 두려움을 통해 표출되는 인간의 권리이며 사회정의입니다. 그래서 요즘 기후정의란 말이 유행하나 봅니다. 얼마 전 10대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와 시예 바스티다는 40개국 정상들과 세계 지도자들에게 화석연료의 시대를 끝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미적대느냐고 꾸짖었다고 하지요.

사실 기후위기가 본격 거론된 것은 30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협상만 하고 있습니다. 탄소배출량 저감에 대한 각국의 선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가시적 성과가 없어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예고된 첫 시점인 2050년이 다가오는데도 말입니다. 보건 전문가들이 대규모 전염병을 경고했지만,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도래해서야 허둥지둥하고 있지만 대응이 늦어서 세계 모든 나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현재 보수적인 예측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지구가 뜨거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후위기는 정부 정책, 기업 경영, 그리고 기술 발전이 책임지고 대응해야 하는데, 여기에 낙관적인 견해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빌 게이츠인데, 그는 우리가 보유한 기술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의 가정을 믿고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국민 각자가 해야 할 몫도 많이 있습니다. 각 개인이 삶의 방식을 바꿔야 변화를 만들 수 있지요. 기르거나, 만들거나, 이동하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모든 활동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구체적 실행으로 나무를 심고, 활동을 줄이고, 덜 소비하고, 건축 시 저탄소 자재를 사용하고, 채소 식단을 권장하고, 대체에너지 사용을 늘려야 합니다.

기후위기는 심각합니다. 두려움을 갖고, 절박한 심정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새마을운동도 탄소중립실천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한겨례> 2021.5.24. 게재되었습니다)